각기병에 대하여

각기병에 대하여

 

각기병(Beriberi) 또는 티아민 결핍증(Thiamine deficiency)은 비타민 B 복합체 중 비타민 B1이 결핍되어 나타나는 병이다.

영어 명칭인 ‘베리베리(Beriberi)’는 싱할라어로 ‘할 수 없어. 할 수 없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증상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다. 통곡류(현미, 통밀 등), 맥주효모, 콩류, 감자류, 돼지고기, 간, 삼치, 넙치, 견과류, 아스파라거스 등 비타민B1이 들어있는 식품을 매일 섭취하는 것으로 치료한다. 비타민 B1은 거의 몸에 저장되지 않으므로 매일 섭취해야 한다. 가공식품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종합영양제를 먹어야 한다.

19세기 이전에 쌀을 주식으로 삼던 동아시아 지방에서 주로 발병되었다. 비타민B1은 콩류, 감자, 곡물의 씨눈이나 돼지고기에 많이 포함되었다. 쌀을 도정해 백미로 만드는 과정에서 이 씨눈이 떨어져 나가므로, 도정된 백미만 먹거나 위절제 수술 등으로 오랜기간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면 비타민 B1이 부족해져 발병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돼지고기나 콩 같은 것을 더 먹을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뭔가 끼니를 때우긴 하는데 몸이 망가지는 무서운 병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통적으로 빈민들과는 거리가 먼 질병이었다. 쌀이 화폐로 통용될 만큼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쌀밥을 매일같이 먹으면 잘사는 집이었고, 같은 쌀밥이라도 여유가 없다면 도정률이 낮은 현미를 먹었고 콩밥이나 보리밥 같은 잡곡밥은 사정이 안 되는 집안에서 먹는 식사였기 때문이다. 빈민들도 쌀밥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일본에선 1950년대 중반, 한국에선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각기병은 반찬은 부실하게 먹은채 쌀밥만 왕창 먹어야 발생했기 때문에 주로 중산층들이 잘 걸리는 질병이었다. 빈민들은 아예 도정되지 않은 잡곡밥을 먹었고 상류층은 각종 식재료를 풍부하게 먹었기 때문. 일본군에서 각기병이 문제가 되었을때 사병들이 보리밥 혼식하면 바로 해결되는 걸 “흰 쌀밥 먹자고 군대 왔는데!”하며 불평했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쌀 자체는 3기작이 가능한 날씨 때문에 비교적 풍족했는데 소득수준이 낮았던 1950-60년대 동남아에서는 꽤나 흔한 질병이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필리핀,말라야 등지 건강 정보 관련된 거 보면 각기병 예방하자는 게 흔하게 나올 정도.

티아민은 세포 내의 에너지 대사에 필요한 조효소의 구성성분이고 하루 필요량은 1-2 mg이다. 근데 이놈은 체내축적이 별로 안 돼서 매일 꾸준히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

주요 증상으로는 무기력증, 수전증, 부종, 신경염 등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증세가 악화되다 사망한다.

돼지고기나 감자를 상대적으로 많이 먹은 서구권에서는 동아시아보다 발병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아시아 각국의 전통의학에서는 흰쌀만 먹지 않고 현미나 메밀, 콩 같은 잡곡, 특히 도정 안 한 곡물을 먹으면 낫는다는 치료법이 전해졌다. 여러 가지 기록을 보면 대략 3-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 같은 치료법이 전해졌으므로 유서깊은 질병이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도정되지 않은 곡물의 씨눈은 비타민 B1을 비롯한 각종 비타민과 영양소가 풍부하기 때문에 실제로 각기병에 특효였다.

각기병은 비타민 발견의 계기가 된 질병이기도 하다. 비타민(티아민)이 결핍되어 나타나는 질병이기 때문에 어떻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타민은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이 각기병에 대해 연구하다가 이론적으로 그 존재가 처음 예측되었고, 훗날 스즈키 우메타로라는 일본의 화학자가 실제로 발견해내면서 인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비타민이 발견되기 전인 19세기 서구 의학에서는, 식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서구권에서는 찾기 힘든 이 질병이 병원균에 감염되어 발병하는지 식중독인지 풍토병인지 논쟁이 많았다고 한다. 결론은 셋 다 아니었고, 비타민 결핍으로 인해 일어나는 류의 질병이었던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는, 게임 대항해시대로 유명한, 비타민 C 결핍으로 발병하는 괴혈병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곡류에 인위적으로 비타민을 첨가해 영양분을 강화하고 있고, 육류는 물론 다양한 식단을 섭취할 방법이 늘어나서 걸리기 힘든 병이 되었다. 하지만 인스턴트 식품은 장기보존을 위한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비타민이 파괴되기 쉬워 인스턴트 식품만을 지속적으로 섭취하면 여전히 각기병에 걸릴 수도 있다. 일본에서 20~30대 독신남녀들이나 직장인들이 갑자기 이 병에 걸린 적도 있었는데, 편의점 도시락과 인스턴트로만 3끼를 채운 사람들이었다.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일부러 작정하고 걸리려고 해도 힘든 병이라고 하지만 매일 매일 몇달 몇 년 동안 밥도 안 먹고 술만 먹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생긴다. 그나마 맥주는 비타민B가 풍부해 좀 낫지만, 맥주라고 해도 그렇게 먹다가 각기병에 걸리기 이전에 죄다 간경화나 심장마비나 중풍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알코올 의존증이 좀 심한 상태가 아닌 이상은 웬만한 알코올 중독자들 대부분이 이렇게 먹지 않겠지만, 심한 진성 알코올 중독자에게는 술이 곧 밥이고 물이며 안주는 구색 맞추기일 뿐이다. 따라서 중독이 심한 사람은 오히려 말랐고 상술한 대로 각기병 위험이 높다.

다른 영양분 결핍증세와 마찬가지로 재난상황 등의 물자가 부족한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기아 등에 의해 발생할 수는 있다. 만약에 대비해 상시 비타민을 섭취하고, 유통기한이 긴 영양제 등을 비축하는 것이 좋다.

인스턴트 라면은 각기병 예방을 위해 비타민 B1, B2를 인위적으로 첨가한다. 그래서 라면이라도 제대로 챙겨 먹으면 각기병에는 안 걸린다. 밀가루 덩어리인 라면 사리가 흰색이 아닌 노란 빛을 내는 이유가 바로 이 비타민 B2 첨가물인 리보플라빈을 넣기 때문이다. 1980-90년대 생물계열 학습만화에서는 각기병을 언급하면서 컵라면을 먹는 어린이 삽화를 종종 볼 수 있었을 정도로, 80년대에는 각기병의 원인으로 라면이 지목된 과거가 있다. 그때는 라면은 편식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밀가루가공품과 식재료에 다 집어넣는 비타민 첨가물은 어찌됐든 간에 성장기 아동에게 라면 한봉지론 영양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또한 한국 전쟁 이후 1960-70년대에 어린이 비타민 보충과 각기병 예방을 위해 효모정제인 원기소에 비타민 B군이 잔뜩 들어있었다. 1980년대에 회사가 부도났지만 요즘 들어 다시 판매한다.

2005년 국민건강 영양 조사 자료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비타민 B를 1인당 하루 권장량의 120% 이상 섭취한다고 한다. 하지만 티아민은 쉽게 걸러지는 수용성 물질이라서 과다섭취한다고 해도 소변으로 간단히 배출되기 때문에 신장에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과다섭취를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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